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날씨가 변한다는 것은 불편한 요소가 될 수도 있지만 건축에서는 그 같은 변화가 부정적이라기보다는 긍정적인 다양성의 요소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우리나라 같이 사계절이 뚜렷한 날씨는 일 년 365일, 같은 날이 하나도 없다. 같은 거리라고 하더라도 날씨에 따라서 다르게 인식이 되어서 찾아갈 때마다 다른 얼굴의 거리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코엑스몰에 가면 일 년 열두 달 같은 풍경이다. 그것은 상업가로에서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다. 한결같다는 것은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다.
[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지대넓얕에서 알쓸신잡
지대넓얕이라고 아시나요? 지금은 책으로 더 유명한 것 같지만 한 때 제가 정말 좋아했던 팟캐스트입니다. 채사장, 깡선생, 독실이, 김도인이라는 네 명의 멤버로 구성되어 다양한 지식에 대해서 얘기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팟캐스트 제목에서 의미하는 것과 같이 넓고 얕은 지식을 다루지만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한 가지 지식을 가지고 네 명이 각자의 전문분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보면 다루고 있던 내용을 더 깊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매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프로그램이 영원할 수 없듯이, 이 팟캐스트 채널도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매력을 가진 프로그램은 찾아볼 수 없게 될 줄 알았지요.
아시다시피 알쓸신잡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죠.
알쓸신잡은 확실히 나영석 사단에서 만든 프로그램답게 정말 전문가들이 모였습니다. 각 전문가들이 하나의 지식을 각자 분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얘기를 나눕니다. 이 책의 저자인 유현준 교수님도 여기서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건축 쪽 전문가 패널로서 나와 이야기를 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건축가의 시선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제 총평은 알쓸신잡 유현준 교수님 편을 따로 만든 것 같았습니다. 예를 들면 펜트하우스가 왜 비싼 지 혹은 도시의 역사는 건축물과 어떤 영향이 있는지, 그리고 동서양의 건축 형태는 어떻게 다른 지 등 다양한 현상들을 건축가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내용에 공감하거나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제가 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하게 해주는 점들이 재미있더라고요. 건축가는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구나 하는 점에서 더욱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약간의 반성도 느끼게 됩니다. 저는 과연 이렇게 세상을 과학자 혹은 공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아직 저는 그 정도 내공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니 그 정도 전문가에 대한 프로 정신이 부족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마저도 듭니다.
책을 보고 저의 프로정신을 의심하게 되는 반성까지 하게 되니 참 씁쓸하면서 재미있네요.
기억에 남는 내용
#1
익명성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다. 보통 사적인 공간에서의 자유를 소유하려면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도 그 크기가 건물의 규모를 넘기 어렵다. 하지만 익명성이 보장이 된다면 우리는 한 도시 크기의 공간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우리는 모두가 유명해지기를 원하지만, TV에 많이 나오는 연예인들은 유명해지면서 동시에 이러한 익명성을 포기해야만 한다. 유명인들은 익명성이 없기 때문에 점점 더 큰 집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집만이 자신이 자유로울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 집도 파파라치로 인해서 공격받는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큰 수영장이 있는 집에 사는 것을 종종 보는데, 하나도 부러워할 것이 없다. 그들은 그 수영장 딸린 큰 집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만 집 밖 어디를 가서도 자유롭지 못한다. 집 밖의 공간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집은 작지만 대문 밖의 모든 공간에서 자유롭다. 유명인이 아닌 분들은 여러 도시를 소유한 부자인 것이다.
#2
알고 보면 우리가 좋다고 그렇게 비행기까지 타고 가서 구경하는 파리도 수백 년 전 당시에 유행하던 집합 주거로 채워진 도시일 뿐이다. 지금 보기에 끔찍한 판상형(성냥갑 같은 형태) 아파트로 가득 찬 강남의 한강변도 100년, 200년 지나고 나면 전 세계에서 비행기를 타고 구경하러 올 20세기를 대표하는 도시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200년 후에는 3D 프린터로 만들어 내는 플라스틱 건물 밖에 없어서 손으로 거푸집을 짜서 콘크리트로 지은 80년대의 아파트가 고풍스러워 보일 것이다. 미래 우리의 후손은 지금 우리가 100년 전 원목으로 만든 한옥을 경외의 눈으로 쳐다보듯이 지금의 콘크리트 건축을 흠모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철거해야 마땅한 환멸의 대상이 아니라 약간은 인내심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할 보존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3
이 같은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간판 경관에 대한 판단은 경험하는 사람이 그 간판을 정보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장식으로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미국인들에게 라스베이거스의 네온사인은 정보로 인식되어 정보가 과부하 되는 상황이 된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 홍콩에 가서 한자로 쓰인 간판을 볼 경우엔 그것들은 모르는 글자이기 때문에 정보가 아닌 아르누보 장식과 같이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책에서 가져갈 한 가지
"나는 과연 내 전문분야의 전문가로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개인적인 평점 ( ★★★ )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건축에 대한 얘기를 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직종 중에 하나인데, 의외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게 놀랍기도 합니다.
그 대가로 요즘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파트의 부실 자재로 인한 붕괴 사고라던가, 비 오는 날 무리한 공사 진행이 그 결과이겠지요. 확실히 우리는 아름다운 도시를 원하지만, 원하기만 할 뿐 무엇이 필요한 지를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만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죠.
이런 걸 보면 최대한 많은 분야의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저도 저만의 시선을 통해서 지식을 다루고 싶네요. 유현준 교수님이 건축가의 시선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저 또한 저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날이 오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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